# 박사 유학을 결심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해야 할 일이 많다. 그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http://econphd.tistory.com/173) 언급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연구'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박사는 강의가 아니라 연구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연구는 뭔가? 학부에서 공부만 하다 보면 이걸 알기 어렵다. 다른 선택지보다 박사가 나아서, 회사 생활은 죽어도 하기 싫어서 박사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연구가 뭔지 감은 잡고 또 내가 거기에 맞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아직 잘 모르지만, 일단 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 혹은 리서치 퀘스천이다. 어떠한 현상 내지는 이론에 대해서 궁금증을 갖고 그걸 어떤 형태로든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연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조금 끄적여 보려고 한다.
# 유학을 나오면 제일 신기한 것이 질문하는 학생들이다. 한국 교실과 미국 교실의 제일 큰 차이점은 미국에는 질문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 그럴듯한 질문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질문도 있으며 논문 좀 읽어보고 왔으면 할 필요 없는 질문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궁금하면 여기 친구들은 그냥 손들고 바로 물어본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창의력 및 아이디어 차이는 바로 이 질문 문화에서 온다고 본다. 얼마 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고 질문하라고 했는데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못했다. 아래는 관련 링크 글.
http://gae9.com/trend/Kg8r39yttd7#!hot
# 질문이 없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한국 사람들은 질문 혹은 의견을 내는 그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갖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도 있고 한국 사람들은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사회 곳곳에서 권위주의 의식이 강하게 존재한다. 의사 결정은 신속하게 하더라도 의견은 다양하게 나와야 할텐데 그것조차도 한국인들은 거부감을 갖는다. 즉,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두번째는, 정답에 대한 부담감이다. 이번엔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국 학생들은 정답이라고 본인이 확신하지 않으면 답하지 않는다. 무조건 정답이어야 한다. 주어진 방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정답을 구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시험이 끝나면, 그 이후 우리가 접하는 여러 문제들은 애초에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주위 사람의 눈치를 보고, 저 사람이 원하는 정답이 무엇인가에 집착한다. open question 자체에 익숙하지가 않다.
# 시험과 연구의 제일 큰 차이는 시험은 정답이 있지만 연구는 정답이 없다는 점이다.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글로 쓰는 상황을 생각하면, 시험볼 때는 내가 이런 것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교수님 생각에 가깝게 써 나가면 되지만, 연구는 교수님과 주위 누구도 정답이 뭔지 모른다. 자기 생각대로 문제를 풀어 나가되 그 논리가 정연해서, 읽는 사람들이 볼 때 문제를 잘 풀었다고 생각하게 하면 된다. 문제 푸는 방식이 옳냐 그르냐에 따른 논쟁은 있지만, 애초에 결론이 맞느냐 틀리냐로 논쟁할 일은 없다.
# 그리고 하나 더. 흥미로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 문제 자체가 재미가 없으면 주위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고 논문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이미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로서 알려진 것을 풀 수도 있다. 다만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인 만큼 이 문제는 풀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상당한 경우 스스로 문제, 혹은 문제의 일부분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고, 동시에 이 문제가 좋은 문제이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 역시 교수님들과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여러 면에서 Follower가 아니라 Leader의 역할을 해야 하며,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Communication 역시 중요하다. 논문 자체는 글로 이루어지지만 실제 커뮤니케이션은 대부분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사항.
# 결국 질문이 없는 한국 문화 자체가 연구를 시작하고 아이디어를 얻기 힘든 문화인 셈이다. 외국 친구들은 그래도 아이디어를 생각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라온 반면 한국 사람들은 문화 자체가 그로부터 거리가 멀다. 문제를 푸는 데만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런데 박사과정을 시작해 보면 문제를 푸는 능력은 이제 큰 의미가 없다. 계량이론이나 미시이론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미국 경제학에서 순수이론 분야는 그 크기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푸는 것으로만 승부하려면 수학박사에 가까운, 전세계 탑 수준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영어라는 언어 장벽까지 더해져서 새로 시작하는 학생들을 괴롭게 한다. 그리고 가만 있으면 졸업하는 게 아니라 논문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졸업을 못한다는 점까지. 박사과정은 학부시절과 많이 다르다.
# 범죄자에 대해서 범죄자의 불우한 환경이 약간의 정상참작은 될지언정 무죄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일단 유학을 나오게 되면 본인의 성장 과정과 한국의 문화 문제는 그냥 하나의 원인일 뿐 이제는 본인이 노력하여 그런 어려움을 견뎌내야 한다. 논문이 제대로 안 나오는 건 본인 잘못이다. 아직 한참 모자란 나 역시 마찬가지. 한국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현상에 대한 분석일 뿐. 내가 못하고 있는 것은 제일 근본적으로는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예전에 경제학은 잘 하면서도 수학에 약하던 친구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경제학 > 수학으로의 이동 이상으로 시험 > 연구로의 이동은 어렵다.
# 나 자신도 잘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학부생 입장에서 연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위에 상술한 것처럼 한국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접할 환경 자체가 적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학 시험은 정답이 분명하게 있고 open question이 더욱 적다. (채점하는 사람의 노고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긴 하지만) 또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도 분야마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다. 논문을 읽어봐야 하는 것은 논문의 테크닉을 배우는 것보다 이 사람이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풀었는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문을 읽으면서 논문으로부터 배우기만 하고 아이디어의 형성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지 않으면 논문 백날 읽어봐야 소용 없다.
# 실증분석을 하시는 한 교수님은 아이디어의 형태로서 하나의 그래프를 이야기한다. 하나의 도표 혹은 그래프를 발견하거나 직접 만들고, 뭔가 현재 경제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찾아 의문점을 갖는 것이다. 그 다음 이유를 찾아 보고, 기존 연구를 찾아 보고, 뭐가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는지 보고, 내가 생각하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다시 보이는 것이다. 이미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를 본인의 독창적인 방법, 혹은 독창적인 자료를 통해 푸는 것도 좋다. 기타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그건 내가 학자로서 좀 더 자리잡으면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 한국 문화에 대해서 좀 더 덧붙이면, 한국 문화는 '느림'과 '틀릴 수도 있음'에 대한 인정이 진지하게 필요한 것 같다. 논쟁을 거치지 않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일처리가 빠르게 된다. 대신 논쟁과 토론에서 나오는 창조성을 얻을 수 없으며, 권력 구조에 이게 영향을 미치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견제할 수가 없게 되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준다. 한국의 경제 발전에는 그동안 이런 빠름과 상명하복이 긍정적인 영향을 줬지만 더 이상은 그런 루트로 발전해 나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한국 문화에 여유를 조합할 수 있을지. 문화적인 문제와 함께 패자도 안아 주는 복지 측면에서의 도움도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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