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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이야기

경제학과 신뢰, 그리고 민영화

# 나이가 먹을수록 주위 사람들이 거짓말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그걸 보면서 어느새 나는 사람을 평가할 때 이 사람이 솔직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우선 순위로 보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전반적으로 사회생활하면서 욕먹지 않는 데는 유리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런 사람 앞에서는 어느 수준 이상으로 편안해질 수 없고 어느 수준 이상으로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 가까이서 보는 개개인의 관계도 이러할진대, '정'이라는 요소도 작용하지 않는 국가의 문제는 더더욱 그러하다.


# 경제학의 기본 원리에 의거하여 작은 정부, 민영화가 옳은 선택임을 맞다. 하지만 경제학자가 민영화를 무조건 찬성한다면 그건 물리학자가 같은 무게의 솜과 쇠구슬이 땅에 똑같은 속도로 떨어진다고 하는 것과 같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쇠구슬의 무게 차이는 땅에 떨어지는 속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공기의 저항이 작용하여 땅에 떨어지는 속도에 차이를 준다. 경제학 역시 근본적인 원리는 작은 정부를 옹호하는 쪽에 가깝지만, 현실에서 민영화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많은 찬반 근거가 있다. 따라서 민영화 이슈에 대해서 비난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비난해야지 경제학 자체에 대한 비난이 되어서는 안된다. 경제학 내에서 충분히 반론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히려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건 '신뢰'에 대한 문제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고 서로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때 얼마나 사회적 손실이 큰지는 경제학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 미시경제를 살펴보면 information economics라는 분야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보경제학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본질을 쉽게 말한다면, A와 B가 거래하는 가운데 A가 거짓말하는 것을 B가 알 수 없을 경우 (경제학에서는 정보 비대칭이라고 한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은 물건을, 특히 품질을 알기 힘든 중고차 같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경우, 위험한 사람을 가려내야 하는 보험사, 직원 채용 및 고용 후 직원 관리 등 여러 부문에 적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A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도록 하는 계약을 B가 만들어야 하고 대부분의 경우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상황보다 나쁜 결과가 초래됨은 물론이다.


# 거시경제학은 신뢰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여부에 따라 정책의 효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신용카드에 대한 이슈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의 가치 역시 이 화폐의 가치가 큰 변화없이 유지된다는 신뢰에 기반하고 있다. 화폐의 가치가 불안정하다면, 사람들은 화폐보다는 현물을 선호하게 되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며 말 그대로 경제가 마비된다. 높은 인플레이션은 작은 나라들에게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20년 전만해도 남미의 큰 나라들에서도 상당히 일어났다. 한국의 경우는 박정희 집권 초반 화폐개혁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으며, 박정희 정권 내내 경제정책이 성공적이었음에도 이 화폐개혁 실패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 그래서 거시경제학은 중앙은행의 역할과 신뢰의 문제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룬다.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과 경기 부양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으로 기울어질수록 사람들은 물가상승을 발견하고 물가 상승에 익숙하거나, 혹은 정책이 발표되는 상황을 통해 물가상승을 예측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 결과 물가상승은 꾸준히 가속이 걸리며 이것은 중앙은행의 경기부양 효과 이상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 중앙은행의 신뢰성, 그리고 독립성이다. 경기 부양은 정부 정책의 다른 카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고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을 일단 최우선 목표로 둬야 하는 것이다.


# 이상의 내용은 경제학 전공자의 경우 2학년에서 필수적으로 배우는 내용들이며, 결코 어려운 내용들이 아니다. 경제학을 박사까지 밟다 보면 예전에 배운 것을 상당 부분 잊어버리게 되지만 그래도 충분히 기억할 수 있는 것들.


# 솔직히 민영화 이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신뢰에 대한 문제가 있는 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성질이라고 본다. 내가 알기로 지금 당장 민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개선을 하는 것인데, 이 개선이 민영화를 굉장히 쉽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이 제도 변화가 만약 철도 부문의 경영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민영화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의 순기능보다는 정부 고위층 몇몇과 낙하산 인사의 혜택을 볼 사람 몇몇의 배를 불리는 것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반대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불신이 있는 한, 그걸 믿는 쪽과 안 믿는 쪽의 대립은 토론을 통해 해결될 수가 없다. 즉, 경제학이 문제를 해결할 토대조차 마련되지 않는 것이다.


# 북한에 대해 직접 찬동하거나 사회 혼란을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행동에 대해서는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밖에 대해서는, 진정 국민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음모론을 포함한 다양한 주장과 의견에 대해서 적당하게 정보를 공개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반대 의견을 탄압하거나 언론 통제를 통해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정책으로는, 결과는 두 가지 중 하나다. 지금과 같은 양자 대립이 계속 심해져서 국가가 양분되거나, 국민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거나. 신뢰는 마음 속의 문제. 애초에 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A라는 친구는 나를 알게 된 얼마 후부터 인사도 하지 않고, '당신이 뭔데 내게 지X이냐?'는 태도로 나를 대한다. (심지어 나보다 어리다.) A랑 친한 B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에 따르면 별 문제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B라는 친구는 주위 사람들에게, 적어도 솔직함에 대해서는 평판이 좋지가 않다. 게다가 B가 A와 나의 관계를 풀어 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나는 B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다. 잘잘못과 옳고 그름을 떠나 신뢰의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정지시킨다.


# 경제학은 신뢰와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민영화 이슈 이면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이야기를 던져준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이슈가 나올 때마다 애꿎은 경제학 전체가 욕먹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P.S. : 그리고 이런 문제처럼, 경제학 이론으로 민영화 찬성과 민영화 반대를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 때는, 민영화에 대한 판단은 empirical 결과에 기반해야 한다고 본다. 간단하게 어느 나라는 이래서 민영화 성공하고, 다른 나라는 이래서 민영화 실패하고, 그래서 우리 나라는 어떨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계량적 방법을 좀 더 잘 사용하면 그럴듯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