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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영화 헌트 후기 (스포 매우 많음)

일단 가볍게 평가를 하자면, 각본의 흐름이나 설정에 대해서는 “한국 영화사에 있어야 하는 영화”가 드디어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재 조승희 공동각본인데 픽션과 팩션을 혼합해서 내어놓은 아이디어 자체가 매우 훌륭하고, 

총격액션이나 스릴러 영화로서의 짜임새 같은 경우도 매우 흥미로운 편. 다만 내가 이런 장르의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은 아니라 사람에 따라 문제점을 발견할 수도 있음. 나는 문제점 거의 발견 못하고 흥미진진하게 봄.

 

그러면 본격적으로 스포를 하자면...

 

1) 이 영화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차용했지만, 기본적으로 허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역사적 배경의 창작물은 역사적 기록을 완전하게 따라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물의 성격에 따라 어떤 창작물은 큰 틀을 그대로 따라가고, 어떤 창작물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바꿔 버릴 수 있다.

 

한산과 헌트의 차이점이다. 한산은 역사가 스포라고 말해도 되는 영화지만, 헌트는 역사가 스포라고 말하면 안되는 영화다. 애초에 허구의 지분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이 정도 전개라면 '전두환이 거기서 죽었어도" 되는 영화인 것이다. 

 

비슷한 영화로 쿠엔틴 타란티노류의 대체역사물들이 있다. 블랙코미디스러운 영화들이라 이 영화와는 궤를 달리하지만, 역사적 배경에서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결과 역사까지 바뀌어 버리는 통쾌함이 있다. 헌트는 그런 내용에 제일 근접해 있는 영화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고, 무게가 있는 내용이다 보니 그것을 바꿔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 영화는 허구를 대폭 첨가하면서 역사적 진실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것이 엄청난 장점이다.

 

2) 그동안 많은 창작물들이 학살범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단죄를 시도했지만, 이 영화처럼 성공적인 작품은 없었다. 다른 영화들은 단죄하려는 측의 선의를 대놓고 강조하면서 선악구도로 흘러가는 경우들이 많았는데, 이 영화는 북한이라는 또다른 악의 축을 만들어 놓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을 단죄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긴장을 불어넣는다. 자주독립을 꿈꾸는 사람들과 외국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충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완전한 선역이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과 북한측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운동을 하려는 사람들도 철부지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꽤 많은 알려진 인물들이 조연들과 특별출연으로 지나가지만 이 영화에서 인상깊은 인물은 결국 주인공 둘 뿐인데, 이들조차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잔인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3) 그래도 주인공 둘은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나온다. 초중반에는 두 사람이 서로 의심하고 충돌하되 주로 이정재 측의 관점에서 영화가 좀 더 진행되다 보니 정우성 쪽이 뭔가를 꾸미는 게 아닌가 싶고, 그러면서도 이정재의 눈빛은 묘하게 흔들리면서 영화 <신세계>에서의 연기가 생각나게끔 만든다. 영화 중반에 거의 동시에 뒤집히면서, 영화는 아주 빠르게 진행되고 동시에 둘이 손을 잡게 된다. 

 

영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이정재가 북한측 스파이를 총으로 쏘는 장면과 정우성이 상관 안기부장을 총으로 쏘는 장면은 매우 급박한 상황 전환을 만들면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이 두 아저씨는 이렇게 멋있게 나오는 역할 둘이 하려고 그동안 그렇게 친하면서도 둘이 같이 영화를 안 찍다가 이걸로 결정했나 싶을 정도.

 

4) 2차 포스터 홍보문구는 스포일러다. 영화의 특성상 내용 상당수가 홍보에서 베일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는데, 살짝 내용을 공개한 저 포스터가 사람들의 관심을 좀 더 환기시켜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전략.

 

5) 조승희 원작에 이정재가 많은 부분을 직접 수정하여 이정재 조승희 공동각본이 되었다는데 아무튼 나는 영화 자체의 아이디어에 감명을 많이 받았다. 영화가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 영화를 통하여 한국영화가 한발짝 진일보한 느낌. 언젠가는 대체역사물 영화도 제대로 한번 만들어지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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