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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관련된 진실

econphd 2014. 11. 27. 03:01

# 뜬금없는 역사 이야기.


# 내 방에 한국 TV가 나온다면 아마 나는 사극들을 챙겨 봤을 것이다. 드라마를 챙겨 보지 않는 주의라 집 떠난 후 대부분의 사극을 보지 않았지만 역사 자체를 꽤나 좋아한다. 사극에서는 적절한 창작과 허구가 동원되게 마련. 그런데 그 와중에 사극에서 제대로 다뤄진 적이 손에 꼽는 문제적 사건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대부분의 사극은 아예 창작된 역사, 실제와 다름을 분명히 하거나 최대한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지만, 몇몇 사극은 역사와 허구를 오가는데 그들 중 제대로 다뤄진 적이 제일 드문, 혹은 전혀 없는 사건이 사도세자의 일이다.


(역사의 기록대로 간다면 서지담이 사도세자에 의해 죽게 된다.)


# 역사도 결국 기록을 통해 추측하는 것이라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기록을 따라가 보자. 무엇보다도,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전적으로 왕인 영조의 결단이지 대신들과 궁인들이 중간에서 모략하여 사도세자를 음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당시 소론 세력은 이미 상당히 약해져 노론이 전반적인 정권을 주도하되, 영조는 집권 초반 정통성 문제가 있었음에도 날이 갈수록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신들이 쉽사리 왕에게 대들지 못했고, 노론, 혹은 시파 대 벽파의 다툼이라기보다는 척신세력, 사도세자의 외척과 기타 명문 대신들이 서로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 결정적으로 사도세자의 비행, 특히 병을 칭하고 몰래 평안도 일대를 다녀온 것은 궁궐 내에 파다하게 퍼지는 동안 왕인 영조만 몰랐고, 이후 여러 차례 문제점은 영조에게 뒤늦게 전달되어 오히려 영조가 대신들에게 이런 일을 왜 숨기느냐고 질책했다. 대신들이 강력한 권력으로 왕과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면 왕이 이런 일을 늦게 알았다는 것이 설명되기 어렵다. 세자는 노론에 포함되는 장인 홍봉한과도 주고받은 서찰 내용으로 볼 때 친했으며, 다만 왕이 격노하자 정승이던 홍봉한도 어쩔 수 없었고, 그 극한 상황에서 세자가 소론인 조재호를 불렀던 것 뿐이다. 그리고 영조가 훗날 정조에게 대신 김상로와 후궁 문씨가 사도세자를 음해했다고 이야기한 것은, 영조 사후 이미 사망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려 후폭풍을 최소화하면서 정조의 정통성을 세워주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 그리고 사도세자에게 병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울증 혹은 조울증이 있었다는 것은 한중록, 실록, 장인 홍봉한에게 사도세자가 쓴 서찰, 아들인 정조의 말 등등 곳곳에 나타나 있다. 또한 병을 칭하고 다른 지역을 다녀오거나, 흥분하여 사람을 죽인 것 역시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단지 역사학자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이덕일이 이것을 의심하고 있을 뿐이다.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성장 당시에는 왕의 자질이 충분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신병을 얻고 또한 비행하게 되었으며 자살소동도 여러번 일으켰다. 그리고 이 원인도 기록되어 있다. 그 원인은, 역시 아버지 영조에게 있다.


#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또한 세자에게 왕의 정무를 대행하게 할 때도 형식상의 대행일 뿐 세자를 믿지 않았다. 성향상 충돌했던 아버지와 아들, 게다가 왕인 영조는 아버지이기 전에 왕으로써 왕좌를 이어나갈 재목을 강하게 원했고 빠릿빠릿하지 못한 사도세자는 성에 차지 않았다. 수시로 왕은 세자를 질책하고, 선위파동을 일으켰으며, 세자는 그 때마다 대죄해야 했고 이것이 병이 되었다. 이에 왕과 사도세자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지고 사도세자도 왕을 기피하게 되었다.


#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결정적인 원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와는 달리 할아버지인 영조의 엄청난 칭찬을 받았고 영조는 사도세자는 부르지 않아도 손자는 자주 불러서 애정을 표현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의 원인이 된 사건인 관서행이 있기도 전에 "지금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을 했다. 더 나아가, 박시백은 직접적으로 영조가 최대한 깔끔하게 왕위를 손자에게 전해 주기 위해 사도세자를 사사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했고, 이는 제법 설득력 있다.


# 나경언의 고변이 있고 사도세자가 여러 날 대죄해도 영조가 반응이 없자 사도세자의 광증은 극에 달했고, 이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결단을 내렸으며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사도세자를 사사했다. 이 날 사도세자는 이미 죽음을 예감했다고 하며, 영조가 온다고 하자 병을 칭하면서 아들 정조의 방한용 모자를 쓰고 나가려고 했었다. 그는 영조에게 당신이 이뻐하는 손자의 아버지가 저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하지만 영조는 아들을 죽였다. 뒤주에 가둬놓고 며칠을 보냈다. 즉 욱해서 죽인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기로 마음먹고 죽인 것이다.


# 결국 이 비극의 시작은 아버지, 왕인 영조에게 있다. 왕으로써 어쩌면 제일 중요한 임무는 후계자를 잘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기대치가 높은 데다가 사람을 가리고 호불호가 심한 영조는 아들을 달달 볶았다. 사도세자가 좀 더 잘 버텼으면 괜찮았을까. 사람의 머릿속에 패배의식, 혹은 절망은 상당한 파괴력을 지닌다. "난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면 열심히 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결국 정말로 잘 안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자 사도세자는 자신은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도, 왕이 될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고 막나가기 시작했다. 자살소동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마치 서울대 가야 한다고 자식을 채찍질하는 학부모와 그걸 못 견뎌서 자살하는 학생. 그런 한국에서 흔한 클리셰의 조선시대 버전 같은 것.


# 게다가 손자가 말을 잘 듣기 시작하고, 단순히 아버지가 아니라 왕으로서 책무를 생각했던 영조는 이미 손자에게 집착하고 있었으며 사도세자 역시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미 사도세자가 정신줄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영조는 왕으로써, 사도세자를 최대한 깨끗하게 죽이고 정조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사도세자 역시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그냥 죽음을 앞둔 사람, 다른 말로 오늘만 보고 사는, 오늘만 사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그건 그가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 고통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서만 가능했다.





# 한가지 안타까움이 남는 것은 역사상 실례가 없었던, 굶겨 죽이는 처참한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 사약을 준비하든가 해도 되었을 일을.



# 위키피디아나 엔하위키에도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된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이 이 일을 비교적 친절하고 수준높게 다루고 있다. 사도세자 관련 1편부터 5편, 그리고 정조가 정통성을 얻는 과정이 나온 정조 1편까지 읽어볼만 하다.

링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8330